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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나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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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마나카 사건은 1961년 2월, 일본의 잡지 《주오코론》에 실린 소설 《풍류몽담》의 내용에 불만을 품은 우익 청년 고모리 가즈타카가 주오코론 사장 시마나카 호지의 자택에 침입하여 가정부를 살해하고 시마나카의 아내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다. 이 소설은 천황과 황실을 풍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게재 이후 우익 단체의 반발과 언론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을 촉발했다. 사건 이후, 언론은 자기 검열을 강화하고, 천황제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는 위축되었으며, 이는 '국화 탭'으로 불리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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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나카 사건
사건 개요
명칭시마나카 사건
다른 명칭퓸류 무탄 사건
발생 위치도쿄도신주쿠구이치가야스나도하라
좌표해당사항 없음 (좌표 정보는 제공되지 않음)
발생 날짜1961년 2월 1일
발생 시간오후 9시 15분경
시간대JST
유형암살 시도 (칼 사용)
목표주오코론 잡지 사장 시마나카 호지 (부재중)
피해 상황
사망자1명 (시마나카의 가정부)
부상자1명 (시마나카의 부인)
가해자
범인고모리 가즈타카
범행 도구
동기잡지에 실린 천황의 참수를 묘사한 단편 소설에 대한 처벌
형량징역 15년
배경
원인주오코론에 게재된 단편 소설 퓸류무탄이 황실을 모독했다는 주장
관련 단체대일본애국당 (소년 K는 정식 당원은 아니었음)
사후 처리
범인 체포사건 다음 날 아침, 범인 소년 K는 아사쿠사 경찰서 야마야 교반에 자수.
수사 결과아카오 빈이 주모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됨.
참고 자료
추가 정보당시 17세였으므로 실명 비공개. 단, 사건 직후부터 실명 정보가 유출되어 국회 의사록에도 실명인 고모리 가즈타카로 기록됨.

2. 배경

1960년, 미일 안보 조약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안보 투쟁)가 일본을 뒤흔들었다. 수십만 명의 시위대가 거리를 메웠고, 같은 해 6월에는 젊은 여대생이 사망하는 폭력적인 시위로 기시 노부스케 일본 총리가 사임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주오코론 1960년 11월호에 후카자와 시치로의 소설 풍류몽담이 게재되면서 시마나카 사건이 시작되었다.[3]

역사학자 닉 카푸르에 따르면, 후카자와의 소설은 일본 제국 기관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는 좌익 거리 시위의 과도함을 비판한 것이었다.[3] 예를 들어, 후카자와는 소설에서 "좌익" (左翼, ''sayoku'')의 "날개" (翼, ''yoku'')를 "탐욕" (欲, ''yoku'')을 의미하는 한자로 바꾸어 언어유희를 사용했다.[3]

2. 1. 풍류몽담 게재와 우익의 반발

1960년 11월, 주오코론에 후카자와 시치로의 소설 《풍류몽담》이 게재되었다.[3] 이 소설은 익명의 화자가 좌익 시위대의 폭도들이 단두대천황황후, 황태자와 황태자비를 참수하는 꿈을 묘사했다.[3] 특히, 천황과 황후의 머리가 "구르고 덜커덩 거린다"는 묘사는 제국 기관과 일본의 국가적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것이라 여겨졌다.[3]

이에 일본 우익 극우 민족주의자들과 궁내청은 분노를 표출하며 사과를 요구했다.[3] 11월 28일, 우익 선동가 아카오 빈대일본애국당 당원 8명이 주오코론 본사에 난입하여 사과를 요구했다.[3] 11월 29일, 궁내청은 쇼와 천황을 대신하여 잡지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을 검토할 의사를 발표하며, "황실의 명예훼손을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항의했다.[29][30]

11월 30일, 주오코론 편집장 다케모리 기요시는 궁내청을 방문하여 천황에게 직접 사과했고, 11월 31일에는 아카오 빈을 만나 12월 호에 사과문을 게재하겠다고 약속했다.[3] 그러나 아카오와 다른 우익들은 주오코론의 공식 사과문에 불만을 품었다. 사과문이 황족의 실명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만 사과했고, 이야기의 문학적 가치를 "제쳐두고"라는 문구를 포함하여 실제로 이야기에 문학적 가치가 있음을 시사했기 때문이다.[4]

이후, 아카오의 대일본애국당 당원들과 마츠바-카이(소나무 바늘 사회) 및 국수회와 같은 다른 우익 극우 민족주의 단체들은 더욱 완전한 사과를 요구하며 매일 주오코론 밖에서 시위를 벌였다.[5] 1월 30일, 아카오 빈은 30명의 우익 단체를 이끌고 주오코론 사무실에 다시 난입하여 2월 호에 추가 사과를 요구했다.[5]

2. 2. 언론의 자유 논쟁

『풍류몽담』 게재 이후, 언론의 자유와 황실 보도, 그리고 황족의 인권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었다. 작품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해학적으로 받아들인 소수의 긍정적인 의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악취미", "반인도적", "생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와 같은 비판적인 것이 많았다.[25]

아사히 신문은 칼럼 "천성의 말"에서 처형 묘사에 대해 "인도에 반한다", "꿈 이야기니까 용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라고 비난했다.[23] 우익은 황족이 처형되고 모독당하는 묘사에 분노했지만, 후카자와 시치로는 60년 안보에서 볼 수 있었던 좌익 운동에서 이야기되는 "혁명"도 패러디하고 있으므로, 우익이 화낼 내용이 아니었다는 지적도 있었다.[20]

반면, 평론가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처형되는 것은 "실존 인물과는 닮지 않은", "인형"처럼 그려져 있다고 옹호하며 "월례 작품 중에서는 최상"이라고 높이 평가했다.[23] 소설가 다케다 타이준도 작품을 "통쾌하다"고 절찬하며, 상징 천황제의 "비인간"성을 지적하며, "천황을 무생물로 여기는 악역은 후카자와 씨가 아니라", "(후카자와를) 심하게" 공격하는 사람들 쪽이라고 했다.[23] 이시하라 신타로는 "무책임하고 쓸모없는 황실에 서민들은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본작은 그 서민의 감각으로서 대중적이고 솔직하게 재미있다"라며 칭찬했다.[26]

소설의 내용은 혁명을 선동하거나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리석음과 공포를 썼다는 해석도 존재한다.[21] 『소문의 진상』 전 부편집장 가와바타 미키토도 "'''일체의 현실적 가치관의 무화'''"가 주제이며, 단순한 반 천황 소설은 아니었다는 견해를 말했다.[27] 작가 나가에 아키라도 어디까지나 픽션이며,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전부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우익의 반응 쪽을 의문시했다.[24]

3. 시마나카 사건의 발생

1960년 12월, 주오코론은 후카자와 시치로의 소설 《풍류몽담》에 대한 사과문을 게재하고 편집장을 해임했다. 그러나 1961년 문학계 2월호에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정치소년 죽다 - 세븐틴 제2부』가 발표되면서 우익 단체들은 다시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21] 1월 30일, 히비야 공회당에서 "적색 혁명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국민 대회"가 열렸고, 이틀 후 사건이 발생했다.

1961년 2월 1일 저녁, 17세의 우익 청년 고모리 가즈타카는 주오코론 사장 시마나카 호지의 자택에 침입했다.[5] 시마나카는 당시 집에 없었으나, 고모리는 칼로 시마나카의 아내를 찔러 중상을 입히고, 가정부 마루야마 가네를 살해했다.[6][5]

다음 날 아침, 고모리는 산야의 파출소에 자수했다.[7] 그는 아카오 빈이 이끄는 대일본애국당 당원이었으며, 사건 당일 아침 당에서 "탈당"한 것으로 밝혀졌다.[5]

3. 1. 사건 개요

1960년 11월, 잡지 《주오코론》에 발표된 후카자와 시치로의 소설 《풍류몽담》에는 황태자·황태자비가 참수되는 묘사 등이 있어, 우익 단체의 항의가 있었다. 대일본애국당 소속 소년 K(고모리 가즈타카)는 불경을 이유로 1961년 2월 1일 중앙공론사 사장 시마나카 호지의 집에 침입했다.[20][21][29][31][5]

21시 15분경, 신주쿠구 이치가야사도하라초에 있던 시마나카 호지의 자택 응접실에서 가정부 두 명이 K를 발견했다. K는 칼을 들고 "사장은 있느냐"고 위협했고, 가정부들은 뒷걸음질 쳤다. 거실에서 나온 시마나카 사장의 부인(당시 36세, 로야마 마사미치의 장녀)과 마주친 K는 "나는 우익이다"라고 밝히며 "사장은 없느냐"고 물었다. 부인이 "없다"고 하자, K는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네가 아내라면 죽이겠다"며 부인의 허벅지를 찔렀다. 50세의 가정부 마루야마 가네는 부인을 보호하려다 K와 몸싸움을 벌였고, 왼쪽 옆구리를 찔렸다. K는 두 사람을 찌르고 도주했다.[20][21][29][31][6][5]

다른 가정부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지만, K는 이미 도주한 뒤였다. 시마나카 사장의 부인은 전치 2개월의 중상을 입었고, 마루야마 가네는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했다.[20][21][29][31]

다음 날 아침, K는 아사쿠사파출소 앞에서 직무 질문을 받고 체포되었다. K는 자수할 생각이었다고 진술했으며,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작품도 나쁘지만, 그것을 팔아 돈을 버는 사장은 더욱 나쁘다"고 말했다. K가 소지하고 있던 손수건에는 "천황 폐하 만세"라고 적혀 있었다.[20][21][29][31][32] 경찰 조사 결과, K는 아카오 빈대일본애국당 당원이었으며, 사건 당일 아침에 당에서 "탈당"한 것으로 밝혀졌다.[5]

3. 2. 범인과 재판

1961년 2월 1일 밤, 17세 우익 청년 고모리 가즈타카는 주오코론 사장 시마나카 호지의 집에 침입해 시마나카의 아내에게 중상을 입히고 가정부 마루야마 가네를 살해했다.[5][6] 고모리는 다음 날 자수했으며, "천황 폐하 만세! 풀잎 위의 이슬처럼 덧없는 인간의 목숨인데, 어찌 천황 폐하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주저하랴?"라는 내용이 적힌 손수건을 소지하고 있었다.[8]

경찰 조사 결과 고모리는 아카오 빈대일본애국당 당원이었으며, 사건 당일 아침 탈당계를 제출한 것으로 밝혀졌다.[5] 아카오 빈은 살인 공모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되지 않았고, 평화 침해 및 협박 혐의로 8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9] 고모리는 성인으로 재판받아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10]

4. 사건의 영향과 결과

고모리의 공격은 ''후류 무탄'' 논란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5] 많은 저명한 정치인과 공인들이 고모리에게 동정심을 표하며, 그러한 선동적인 작품을 게재한 ''주오코론''을 비난했다.[11] 일부 보수적인 국회의원들은 전시 전의 국왕 모독죄를 부활시키기 위한 법안을 발의하려는 노력을 공개적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11]

작가 후카자와 시치로는 시마나카 호지의 집에 대한 공격에 충격을 받았다. 공격 다음 날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그러한 공격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며, "그[고모리]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풀려고 했다면 나를 공격했어야 했다"고 덧붙였다.[13]

''주오코론''의 편집장 다케모리는 처음에는 시마나카의 집에 대한 공격에 대해 반항적으로 대응했으나, 결국 시마나카는 다케모리의 사임을 수락했다. 작가 후카자와는 눈물을 글썽이며 기자 회견을 열어 그 이야기에 대해서도 사과했다.[14] 그 직후 후카자와는 24시간 경찰 보호를 받으며 일련의 익명의 장소로 숨어들었고, 그 후 5년 동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12] 미시마 유키오를 포함하여 그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다른 문학가들도 협박을 받았다.[12]

11월 29일에는 궁내청이 "황실의 명예훼손을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항의하는 내용을 발표했고[29][30], 이케다 하야토 내각의 각의에서는 황실을 대신하여 궁내청이 민사 소송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내각관방장관이었던 오히라 마사요시가 제지하여 소송에는 이르지 못했다.[21]

그해 늦게 보수적인 국회의원들은 ''국왕 모독죄'' 법안을 국회에서 논의할 준비가 되었다고 발표했고, 이때 신문 및 잡지 연합은 언론이 자기 검열을 하고 황족에 관련된 작품의 게재를 막겠다는 약속을 대가로 의원들과 법안을 철회하는 데 합의했다.[15] 이에 따라 시마나카 사건은 학자들에 의해 전후 일본에서 천황이나 황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문학적 또는 예술적 표현을 비공식적으로 강력하게 금지하는 이른바 국화 탭(菊タブー, ''kiku tabū'', 황실의 국화 문장에서 유래)을 굳히는 데 기여한 것으로 인용되고 있다.[1]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대일본애국당의 총재 아카오 빈은 살인 교사·살인 미수 교사 등의 죄로 1961년 2월 21일에 체포되었지만, 4월 17일에는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되었다.[20]

1962년 도쿄 지법에서 피고인 K에게 징역 15년의 판결이 내려졌다. K는 "형을 받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며 항소하여 무죄를 주장했지만, 1964년 11월 9일 도쿄 고법은 항소를 기각했고, 형이 확정되었다.[38]

4. 1. 언론계에 미친 영향

이 사건으로 범인이 다음 날 자수했지만, 가정부가 사망하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여, 황실에 관한 언론은 일시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17] 이 사건 이후에도 이어진 우익의 항의에 주오코론사는 굴복했다. 다른 우익 관계자에게 조정을 의뢰하여 밀실에서 합의했다고 하며[17], 공개적으로 논조가 변화한 점도 있어, 언론계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다.[18][19]

태평양 전쟁 후의 언론의 자유와 황실 보도를 논할 때 상징적인 사건이며, 가와카미 조타로 상해 사건, 기시 수상 습격 사건,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등, 안보 투쟁에서 일시적으로 흥륭한 좌익운동에 대항하듯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우익의 테러 사건 중 하나였다.

1960년(쇼와 35년) 11월 초에 잡지 『중앙공론』에 발표된 후카자와 시치로의 소설 「풍류몽담」에는, 황태자·황태자비가 참수되는 묘사나, 천황·황후의 목 없는 시체가 등장하거나, 쇼켄 황태후가 상스러운 말을 하거나 면박을 당하는 묘사 등이 있었다. 이를 "불경"이라고 하여 우익의 항의 활동이 즉시 일어났지만, 과열되는 비판과 옹호 논쟁 속에서, 우익 단체대일본애국당에 소속된 소년 K가, 주오코론사 사장 시마나카 호지 자택에 침입하여 일으킨 살상 사건이 본 사건이다.

1961년(쇼와 36년) 12월, 주오코론사는 사상의 과학 연구회(思想の科学研究会)가 편집하는 『사상의 과학(思想の科学)』 1962년(쇼와 37년) 1월호를 일방적으로 판매 중지하고, 파쇄 폐기 처분했다.[25] 이는 해당 호의 특집이 천황제였기 때문이며, 시마나카 사건의 영향으로 자율 규제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 호를 파쇄하기 전에 우익인 미우라 요시카즈(三浦義一)와 공안 조사관(공안 조사청 직원)에게 읽게 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연구회는 이에 항의하여 주요 멤버(좌익계 논단인)가 주오코론사에 대한 집필을 거부했다.[25] 더욱이 『사상의 과학』도 주오코론사에서 독립하여, 자체 간행하게 되었다.[25]

주오코론사의 논조에서 체제 비판적인 요소는 쇠퇴하고, 집필진도 지금까지 주력이었던 혁신(革新)계 논객 대신 하야시 후사오(林房雄), 나가이 요노스케(永井陽之助), 고사카 마사타카(高坂正堯)와 같은 보수(保守)계(혹은 비혁신계) 논객이 등장하게 되었다.

평론가인 마쓰우라 소조(松浦総三)는, 이 사건부터 미시마 유키오 사건까지 10년 동안 천황제를 비판하는 기사가 격감했다고 언급한다.[39] 사건 후에는, 주오코론사뿐만 아니라 언론계 전체가 위축되어, 황실에 관한 언동에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고 지적된다.[40]

4. 2. 정치적 영향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만연한 우익 폭력의 문제를 드러냈다.[37] 사건 직후, 일본 정부는 정치적 폭력 행위 방지 법안을 추진하려 했으나, 야당과의 협의가 불발되어 폐기되었다.[21]

일부 우익 단체들은 불경죄 부활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11] 신사본청 등이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했으나, 국민적 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20] 자민당도 당 차원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4. 3. 사회적, 문화적 영향

시마나카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표현의 자유, 폭력,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5] 많은 정치인과 유명 인사들이 고모리에게 동정심을 표하며, '주오코론'을 비난했다.[11] 일부 보수적인 국회의원들은 국왕 모독죄를 부활시키려는 법안을 발의하려 했다.[11]

작가 후카자와 시치로는 이 사건 이후 5년간 은둔 생활을 했다.[12] 그는 매일 살해 협박을 받았으며,[5] 미시마 유키오를 포함한 다른 문학가들도 협박을 받았다.[12] 후카자와는 자신의 이야기가 그러한 공격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13]

신문 사설들은 고모리의 폭력을 비난하면서도, 동시에 '풍류몽담'의 게재가 "부적절했다"고 지적했다.[11] 심지어 일부 좌익 지식인들조차 후카자와의 이야기에 반대하며, 일본 문예 잡지에서 "문학적 가치"의 의미를 둘러싼 논쟁을 일으켰다.[11]

이 사건으로 '주오코론' 편집장 다케모리는 사임했고,[14] 후카자와는 기자 회견을 열어 사과했다.[14] 이후 후카자와는 24시간 경찰 보호를 받으며 은둔 생활을 시작했고, 5년 동안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12]

보수 국회의원들은 국왕 모독죄 법안을 국회에서 논의하려 했으나, 언론과의 합의를 통해 철회했다.[15] 언론은 자기 검열을 하고 황족 관련 작품 게재를 막겠다고 약속했다.[15] 이 사건은 전후 일본에서 천황이나 황실을 직접 다루는 문학적, 예술적 표현을 금기시하는 국화 탭을 굳히는 데 기여했다.[1]

이 사건은 황실에 관한 언론을 위축시켰고,[17] 중앙공론사는 우익의 항의에 굴복했다.[17] 다른 우익 관계자에게 조정을 의뢰하여 밀실에서 합의했으며,[17] 언론계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다.[18][19]

태평양 전쟁 이후 언론의 자유와 황실 보도를 논할 때 상징적인 사건으로, 가와카미 조타로 상해 사건, 기시 수상 습격 사건,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등과 함께 우익 테러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미치 붐이 일어난 상황에서 발표된 '풍류몽담'은 황족의 인권 침해 논란을 일으켰다.[23] 아사히 신문은 처형 묘사를 비난했지만,[23]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옹호했다.[23] 다케다 타이준은 작품을 칭찬하며 상징 천황제의 "비인간"성을 지적했다.[23] 이시하라 신타로는 서민들의 불만을 대변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26]

우익은 황족 모독에 분노했지만, 후카자와는 좌익 혁명도 풍자했기에 우익이 분노할 이유가 없었다는 지적도 있었다.[20] 소설 내용은 혁명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을 썼다는 해석도 있었다.[21] 가와바타 미키토는 "일체의 현실적 가치관의 무화"가 주제라고 평가했다.[27] 나가에 아키라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우익의 반응을 문제 삼았다.[24]

사건 이후, 주오코론사뿐만 아니라 언론계 전체가 위축되어 황실 관련 언동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40] 마쓰우라 소조는 이 사건부터 미시마 유키오 사건까지 10년간 천황제 비판 기사가 격감했다고 언급했다.[39]

1961년 12월, 주오코론사는 사상의 과학 연구회가 편집하는 '사상의 과학' 1962년 1월호를 판매 중지하고 폐기 처분했다.[25] 이는 해당 호의 특집이 천황제였기 때문이며, 시마나카 사건의 영향으로 자율 규제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연구회는 주오코론사에 대한 집필을 거부하고, '사상의 과학'은 독립하게 되었다.[25] 주오코론사의 논조는 체제 비판적 요소가 쇠퇴하고, 보수계 논객이 등장하게 되었다.

《풍류몽담》은 오랫동안 봉인되었으나,[20] 해적판으로 유포되었고, 인터넷에도 공개되었다. 2011년에는 전자책으로 간행되었다.[41]

4. 4. 미시마 유키오와의 관계

일각에서는 미시마 유키오가 풍류몽담을 칭찬하며 편집부에 압력을 가해 잡지에 싣도록 추천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졌지만, 미시마는 이를 완전히 부정했다.[22][42] 미시마는 무명이나 신인도 아닌 후카자와 시치로의 작품을 자신이 출판사에 압력을 가해 추천할 리가 없다고 소문을 부인하며, 편집자 중 누군가가 책임 회피를 위해 그런 거짓말을 퍼뜨린 것이라고 말했다.[42] 이 유언비어 때문에 미시마에게까지 협박장이 날아들었고, 한동안 경찰의 경호가 붙었다.[22][43] 미시마는 자신의 작품 우국의 원고를 편집자에게 건네줄 때, 이미 다른 편집자에게 보여 읽었던 후카자와의 풍류몽담 원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오히려 일어날 문제들을 우려하여 자신의 우국과 함께 싣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고 한다.[22][43][44]

5. 한국의 관점과 평가

시마나카 사건은 일본 우익 단체의 압력과 폭력으로 인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된 사건으로,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 우익 단체들은 주오코론샤에 대한 협박과 테러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 했다. 이는 1960년대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한국 사회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갈등이 존재해왔다. 특히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이나 독도 문제 등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거나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이지만, 시마나카 사건은 표현의 자유가 사회적 책임과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보여준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표현은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용인될 수 없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시마나카 사건은 또한 정치적 극단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일본 우익 단체의 폭력적인 행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세력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의 폭력적인 방식은 사회 통합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시마나카 사건은 표현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 그리고 정치적 극단주의의 문제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건이다. 한국 사회는 이 사건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극단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5. 1.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

시마나카 사건은 표현의 자유, 사회적 책임, 그리고 소수자 인권 보호라는 중요한 가치들이 충돌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언론의 자유를 중요하게 여겨왔지만, 동시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표현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러나 시마나카 사건에서 나타난 것처럼 표현의 자유가 무제한적으로 허용될 경우,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인권이 침해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황족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은 더욱 세심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시마나카 사건은 언론과 창작자에게 표현의 자유만큼이나 사회적 책임이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요시모토 다카아키와 같은 평론가는 (황태자 부부가) "인형"처럼 그려졌다는 점을 들어 묘사를 옹호했지만,[23] 일반 독자들은 이러한 표현이 노골적이고 불쾌하다고 느꼈다.[23] 이는 표현의 자유가 때로는 사회적 통념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사히 신문은 시마나카 사건의 처형 묘사를 "인도에 반한다"고 비판했지만,[23] 다케다 타이준은 상징 천황제의 "비인간"성을 지적하며 작품을 옹호했다.[23] 이처럼 다양한 관점을 고려하여 표현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시마나카 사건은 한국 사회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한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건강한 공론장을 형성하고 사회 통합을 이루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5. 2. 한일 관계에 미친 영향

시마나카 사건은 일본 내에서 천황제와 관련된 논의가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가 일본 사회의 특수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23]

더불어민주당은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면서도,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 구축을 추구한다. 시마나카 사건은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 사회의 특수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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